어린 시절부터 가축과 함께…그 행복감 때문에

<젊은이가 돌아오는 희망 축산 - 후계 성공사례>

 

 

스무 살 천안으로 올라가 축산전공 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편입을 했다. 부족하다 생각했던 전공 공부를 마저 하면서 수없이 고민했었다.

부모님이 목장을 하시지만 어느 정도 사회에서 더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고 목장에 들어가 일할 생각 이였기 때문에 또래 친구들과 같은 취업고민에 한창 빠져있었다. '여자이니까… 유업체나 연구소 같은 사무직을 지원 해야 할까?' 혹은 '동물원에 취업해서 사육사로 일을 할까…'. 축산관련학과로 진로를 선택 할 때에는 졸업 후에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부분에 대해서 사실 명확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두 가지 이유였다. 동물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이렇게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이나 두려움 앞에서 쉽게 용기 잃지 않기를 수없이 다짐했기 때문이다.

 

 

한 마리 송아지로 시작해 30년을 축산업에 몸 담아 오시던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1년 365일 쉬지 않고 달려오셨다. 누구보다도 가축을 키우는 이 일이 힘들고, 쉽게 놓을 수 없는 정이 참 많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왔다. 내 어린 시절 어느 날 이였다. 새근새근 잠든 나를 혼자 집에 두고 논밭으로 나가 한창 풀 작업 중 이였던 부모님은 일하던 도중 저 멀리 산속 목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걸 발견했다. 다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달려 집에 와보니 온통 불바다였다.

잠에서 깼던 나는 혼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 했던 것이다. 수많은 소방차가 목장을 에워싸고 화재를 진압하던 긴박한 순간 속에서 오로지 부모님은 아이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가 일을 해야만 했던 고된 생활 그리고 어린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아직도 그날의 상황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부모님은 허허벌판 논으로 나를 늘 데리고 다니셨고, 볏단 사이로 폭신하게 쌓은 마른 풀 침대에 눕혀놓고 일을 하시곤 했다. 그렇게 해가 질 무렵이면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목장에 올라가 소들을 돌보던 그때 그 시절. 그렇게 쉬는 날 없이 피땀 흘려 일하시던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가족의 무한한 사랑 그리고 가축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얼마나 커다란지 수없이 보면서 자랐다.

보고 자란 게 동물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는 일 이였고, 자연스레 다른 일 보다는 동물을 상대하는 이 일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껴왔다.

부모님이 다져놓은 소중한 이 목장을 누가 이어 가냐며 주위에서 다들 묻곤 했다. 몸도 마음도 여리고 여성스러운 큰 딸보다는 장군같이 듬직하고 힘도 센 아들 같은 둘째 딸인 나를 보며 네가 대를 이어가라는 소리 또한 줄곧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께서는 조금씩 목장의 일을 도와오던 자식들에게 힘든 이 일을 맡기고 싶어 하진 않으셨다. 여느 부모가 다 그렇듯, “공부나 잘해서 서울대나 가라” 라고 말씀 하실 뿐…그래도 동물이 좋다고 이 길을 가겠다는 자식을 누가 말릴까, 다만 오로지 본인 의지로 결정하길 그리고 이 일에 얼마나 큰 책임감이 부여되는지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학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당장 무얼 할지에 대해 고민 하던 중, 당시 축산업에 종사하고 계시던 축산인들의 평균연령이 점점 높아져 간다는 기사를 보았다. 흔히 3D업종에 속하는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분야라는 인식에 낙농산업은 젊은 사람들이 쉽게 뛰어들기엔 어려운 불모지였다. 대를 이어갈 후계 농업인이 없는 농가는 결국 폐업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3년 전 만해도 내 주위를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축산농가에 후계자로서 가업을 이어가는 젊은 축산인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조금 나이가 든 뒤에 시골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 이였다.

나 또한 바깥에서 축산 관련 일을 해보며 경험을 쌓고 목장에 들어가 일할 생각 이였지만 뭔지 모를 끌림에 나는 졸업과 동시에 낙농2세의 길을 택하게 된다.

사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주위 친구들이 받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스트레스와 압박감 속에서 빨리 벗어나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들 부모님 잘 만난 덕에 쉽게 일자리 구하고, 편하게 일하며 돈 번다는 말들도 많았다. 성격상 문화생활과 소통이 쉬운 도시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맞을 텐데, 그렇게 시골에서 또래친구들도 없이 외로운 생활을 네가 버텨내겠냐며 2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게 분명하다 는 말도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일까, ‘절대 후회하지 말고 보란 듯이 더 열심히 일해야지. 꼭 버텨서 더 크게 목장을 일궈나가야지. ‘이런 생각들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처음 목장에 들어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일을 할까, 반복되는 고된 노동 속에서 쉬는 날 없이 하루 2회 꼬박 이루어지는 착유 과정들...

틈틈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축산관련 교육 및 행사는 꼭 달려가 보고 듣곤 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다니다 보니 전국의 많은 농가와 소통하며 교류할 수 있는 인맥이 형성되었고, 내가 부족하고 힘들어 하던 부분들을 그들에게서 도움 받고 때로는 위로도 받으며 그렇게 낙농인으로서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목장마다 추구하는 부분은 다 달랐고, 모두 다른 방법과 노하우로 자신만의 길을 닦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소통하면서 나 자신은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의 정답이라는 건 없었다.

그저 확고한 나만의 주관과 고집이 있다면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 낙농산업에 대한 전통과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게 바로 내가 느끼고 선택했던 나만의 목표였다.

 

‘내 목장 브랜드화’

똑같은 가축이라도 고기와 가죽에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양질의 가축을 보유한 소유자는 다른 사람이 키우는 가축과 구별하기 위해 낙인을 찍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차별적 우위성은 다른 제품과 서비스보다 품질 면에서 우수하고, 소재/제조기술/성능/안정성 등에서 뛰어나며, 나아가서는 혼과 마음을 담은 서비스가 어디보다도 훌륭하다는 것이다.

또한, 차별적 우위성의 차별이란 독자성을 의미한다. 즉,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에는 없는 독자적인 연구나 노력으로 유일한 매력을 가지는 것이다.

‘목장을 브랜드로?’ 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내가 느꼈던 우리나라의 낙농산업 그리고 대를 이어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대게 20~30년 가까이 가축을 키우며 자신만의 영역을 키운 이 분야는 대를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부분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식의 차이일까, 시골 안에서는 더 이상 발전이란 없는 진부한 산업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작지만 강한 강소농처럼 전통과 역사가 살아있는 우리 축산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2세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목장과는 달리 어떤 영역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무언가가 있는 차별성 있는 목장을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젖소를 키운다는 건 건강한 소에게서 맛있는 우유를 생산하는 일이다. 질 좋은 우유를 더욱 맛있고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연구 하는 일은 소를 키우는 나에게 더욱더 흥미롭고 자신 있는 일이였다.

그냥 우유와 그냥 유제품이 아닌 우리 목장의 전통과 이야기가 담긴 재미있고 맛있는 유제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곳곳에서 목장형 유가공을 하고 있지만 좀 더 다양한 유제품을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목장이 직접 운영하는 작은 카페와 같은 개념의 유제품 가게가 많다. 믿고 먹을 수 있고, 근본적으로 생산자가 직접 다루는 제품이기에 각각 자기가 자신 있어 하는 주 품목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전문적으로 자신만의 목장을 브랜드화 시키고 있었다.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유제품에 한계는 없다 생각하며 늘 자료들을 찾고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목장에서 10km 남짓 떨어진 곳에서 작은 유제품 전문점을 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온 생각들과 세계 곳곳의 유제품 매장들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은 아주 소박한 공간이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건강한 소를 기르고 그 소에게서 생산되는 고마운 우유를 더욱 질 좋은 유제품으로 만드는 그런 소박하고 성실한 낙농인이 되고 싶을 뿐이다.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무조건 가보아야 한다는 나만의 철학으로 수많은 곳에서 보고 배워온 것들을 지금 이곳에서 모두 쏟아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배웠던 아이스크림과 일본의 밀크잼 그리고 호주 여행 중 우연히 들렸던 작은 농장의 카페에서 보았던 아주 특색 있던 우유 디저트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사랑 받을 수 있는 맛있고 건강한 유제품을 만들지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 내 가장 큰 기쁨이며 활력소인 듯하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우유를 제공해주는 젖소에 대한 관심과 열정 또한 잃지 않아야 한다. 비록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생활이 되었지만 지금 이렇게 가축과 함께 지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우유 제품들을 맛보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의 연속인 것 같다.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먼 새내기 3년차 낙농후계자 이지만, 앞으로 현실에 안주 하지 않고 늘 변화를 꿈꾸며 달리는 멋진 낙농인이 되고 싶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무조건 현실화 시킬 수 있도록 당장 재료부터 내 가슴속에 부지런히 담으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당신의 가슴 속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고, 그것은 충분히 현실에서 이룰 수 있으며 당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 줄 거라 확신한다.

젊은 2세 축산인 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 늘 도전 하는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축산인 2세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도 현장에서 무한한 수고를 하고 계시는 모든 축산인 분들께 진심으로 존경과 응원을 표하며, 2세 낙농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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