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가 개방되고, FTA가 잇따라 체결되면서 칠레·EU·미국·호주·뉴질랜드 등 농축산 강대국들로부터 농축산물이 물밀 듯 수입되면서 국내산 농축산물이 살아남는 길은 ‘품질’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저비용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이들 국가들과의 가격 경쟁으로는 국내 농축산업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푸드마일(Food Mile)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농축산물에 대한 정보도 멀어져 어떻게 생산하는 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안전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판매할 곳 없어 곤란

 

농축산물에 대한 브랜드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도 그 즈음이다. 국내 축산정책도 품질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2003년 난립했던 축산물 브랜드를 정리해 소수의 파워브랜드 육성에 자금을 투입했다. 축산물의 등급판정에 ‘지방이 침착된 정도’가 정착되고, 마블링의 정도가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 결과 축산물의 품질이 크게 강화됐다. 정부가 농축산물 개방정책을 펴면서 당국의 관계자나 학계에서 내세운 경쟁력 강화의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브랜드 정책의 2단계인 ‘생산자들의 조직화’도 적절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판매단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이미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에게 ‘당신들이 고품질의 축산물 생산에만 전념하면, 우리가 그것을 최적의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팔아 노력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설명하면서 축산물 브랜드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과 자금을 투여해 브랜드를 출원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판매할 곳이 없었습니다. 사업단을 만들고 브랜드 홍보를 해야 했는 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정부의 품질 고급화 정책으로 불이 지펴진 ‘농축산물 브랜드화’는 당시 700여개가 난립했던 축산물 브랜드를 통·폐합을 통해 정리하고 강력한 브랜드를 육성해 외국산 축산물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전국의 일선조합을 주축으로 공동브랜드가 탄생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러나 그 의도도 생산농가의 ‘좋은 물건이 있으면 어디서든 팔릴 것’이라는 순진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통업계가 시장 좌우

 

현대 식품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지역화와 세계화로 무장해 유통망을 장악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유통업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때문에 생산자 조직을 육성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지만 사업단을 구성하고 그것을 운영하는 자금지원에는 인색했다.

대부분 정부와 시군의 지원자금으로 구성된 사업단들은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없던 농가들을 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했지만 판로를 확보하지 못하자 운영난에 허덕였다. 관계당국은 현장에서의 애로사항을 덜어주고자 ‘브랜드 주체와 바이어와의 간담회’ 등을 주선하고 대형 유통업체들과의 연계를 도모했다.

이는 매장의 다양화를 꾀하기 위해 식품산업과의 연결을 고민하고 있던 대형 유통업체들에게도 좋은 사업거리였다. 그 결과의 일례로 롯데백화점·마트와 전국 최초로 구성된 전남 동부지역의 한우공동브랜드인 ‘순한한우’가 판매협약식을 맺었다. 새로 등장한 한우공동브랜드의 가치에 롯데라는 브랜드 파워가 접목되면서 순한한우는 고급브랜드로 소비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순한한우로는 브랜드가 밋밋했던지 롯데는 그 앞에 ‘지리산’이라는 명칭을 달 것을 요구했고, 순한한우 사업단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현재 롯데마트에는 자체 한우브랜드 매대도 들어서 있다.

네슬레, 월마트, 제너럴 푸드와 크래프트 등과 같은 대형 식품가공업체와 유통업체들은 현재 영역이 따로 없다.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한다. 이마트, 롯데마트를 비롯한 국내 대형유통업체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앞선 그들의 변천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매상품에 국적 없어

 

현재 대형 유통업체들의 매장에는 식품 코너가 한 층을, 외식이 다른 한 층을 차지할 정도로 매출의 비중이 크다. 수입된 농축산물의 취급도 자유롭다. 이것들을 배열 배치하는 디스플레이도 소비자를 유혹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곳에서 팔리는 농축산물에는 국적이 없다. 정부나 소비자들로부터 왜 국내산만 취급하지 않느냐 질책을 받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납품업자나 생산농가에게는 ‘갑’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가격 후려치기’를 감내해야 한다. 매대에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나마 판매가 양호할 때의 일이다. 소비자의 발길이 저조하거나 뜸할 경우엔 감쪽같이 사라져야 할 운명이다.

“3~4등의 제품은 제품으로의 가치가 없습니다. 생존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지요” 유통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전국 1700여개의 대형 유통망을 지닌 농협중앙회가 「판매농협」의 기치를 내 건 이유이다. 농협이 국내 유통업계의 그림자를 거둬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같은 흐름은 유통업계에 내재해 있는 근간이기 때문이고, 농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판매농협의 역할은 뭘까?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