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 위주의 진형을 짠 홍명보 사령관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사막 저 편을 바라보면서 한껏 고무돼 있었다. 수차례의 모의 전투를 치루면서 국민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던 그의 부대는 전날 얼음의 전사들과의 싸움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했기 때문이다. 그 전투를 지켜본 국민들도 모의 전투에서의 우려를 접고 기대감에 부풀었다.

 

‘느긋하게 지켜보자’

 

처음부터 개전 상대인 러시아와의 전투에 몰입했었다. 지지 않는 전쟁. 어차피 ‘사막의 여우’로 불리우는 알제리와는 이기겠다고 작심한 전투였다. 유럽의 전사들과의 싸움을 보니 여우는 무슨 여우. 수비에 치중하다 결정타를 날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벨기에와의 졸전으로 국민들로부터 당장 사령관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고 있으며, 부대원들도 싸움꾼을 모두 제외하고 이전과 같이 수비 위주로는 한국과 싸우지 않겠다는 내홍이 일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참 콩가루 집안이구나’ 생각했다.

또 이름도 외우기 힘든 저쪽의 사령관 바히드 할릴호지치는 전술을 바꾸겠다고 공표했으니, 저쪽의 전략은 이미 알고 있다. 벨기에전을 보니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는 힘들 것이라 여겼던 러시아전에서 비겼지만 외부에서의 평가를 보니 이긴 것이나 진배없다.

우리에겐 유럽으로 파견 나가 힘과 기교까지 습득한 유능한 대원들이 있다. 게다가 유럽에선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려 줄 대원도 있다. 홍 사령관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알제리군을 보면서 씩하고 웃으며 엄지로 콧잔등을 훔쳤다. ‘올테면 와라. 흠씬 두들겨 주마’ 자신했다. 적국의 행색을 보니 많이 바뀌긴 했지만 어차피 후보군이다. 홍 사령관은 언덕 위에서 깃발을 내리며 진군을 명령했다.

좌우측에서 사소한 접전이 벌어졌다. 약간 밀리는 듯 했지만 뭐 대수겠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안정되고 적군의 전진만 막으면서 체력을 소모시키면 적진을 휘저을 지원병도 있겠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적을 쓸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홀린 듯 정신 못차려

 

적과 아군의 지엽적인 부딪침이 20분 가까이 지나자 적군이 뒤로 밀렸다. 그 뒤를 아군이 밀고 나가는 사이 적군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뭐지? 그 순간 적군 안에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기병이 튀어 나왔다. 앗! 하는 사이에 아군 장교들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바람처럼 아군 진영을 휩쓸며 지나가는 적군의 칼날이 빛살처럼 스쳐갔다. 그 때마다 선홍색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예상치 못한 기병의 출현으로 아군 진영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팔 다리가 허공으로 날아 다녔다.

싸움에 이골이 난 고참병도 없는 아군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적 기병에게, 보병에게 난자당하고 있었다. 놀라기는 홍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참담함에 그는 얼어붙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고 있었다. 작전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빨리 이 참담한 시간만 지나가길 빌었다.

 

시간 지나기 바랄 뿐

 

마음껏 진영을 유린한 저 사막의 라이언들이 유유히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자 아군 진영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동료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고, 그들의 피로,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아! 이것이 정녕 현실인가? 홍 사령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내로 참여한 손흥민도, 살아남아 기진맥진한 구자철도, 중원을 지휘하던 기성용도, 싸움에 참여하지 못하고 지켜보면서 손을 불끈 쥐고 사령관의 명령만 기다리던 이근호도, 김신욱도 쏟구치는 울분에 굵은 눈물만 흘렸다.

억울하고 억울해 분을 참지 못한 손흥민은 땅에 거꾸로 꽃힌 장창에 깃발을 달고, 상처 입어 비실대는 말에 올라타고 적진으로 단기 돌입했다. 눈에 보이는 적병을 사정없이 찌르고 벴다. 궤멸됐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병들이 그 기세에 눌려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 뒤를 구자철과 이근호, 김신욱이 돌진했다. 무기가 빈약해도 상관없었다. 막내가 아군의 버팀목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전투가 끝나자 손흥민은 손에 갈기갈기 찢긴 깃발 달린 창에 기대 울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왜 진작에 이처럼 싸우지 못했을까?’, ‘왜 좀더 용기를 내서 기병 앞에 나서 버티지 못했을까?’ 밀려오는 후회 때문에 가슴을 쳤다.

누군가 말한다. ‘축구는 전쟁’이라고. 때문에 지휘관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전략과 전술이 달라져야 전쟁에서 승리한다. 일순간의 자만과 상황을 오판하지 않는 냉철함이 갖춰져야 한다. 또 하나의 참사가 덧붙여졌다. 우리는 지금 리더십 부재의 결말을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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