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반격의 토대가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해 프랑스의 한 해안에서 상륙 도중 사망한 「라이언」이라는 이름이 본토 전사자 통지서를 작성하는 부서에 올라온다.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던 여직원은 우연히 3명의 형제가 각각 타지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상급자에게 달려간다.

상급자는 한 홀어머니의 4형제가 모두 참전 중이며, 그 중 3형제의 사망이 확인됐고, 마지막 1명의 라이언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됐다. 부랴부랴 그 한 명의 라이언을 살려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국민이 주인이다

 

10명 내외의 구출팀을 꾸려 전장터의 한 가운데로 투입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전쟁영화의 백미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미국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구출팀원들이 차례로 죽어가면서 갖게 되는 ‘왜 한 명의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다수가 희생돼야 하느냐’는 의구심을 국가가 나서서 설명하지 않고 죽어가는 병사들이 스스로 수긍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교우위 경제학자의 논리대로라면 한 명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그러나 국가는 4명의 자식을 전쟁에 보내고 모두 사망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3명의 자식을 잃은 그 어머니의 슬픔을 보듬고 달래야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속으로 내 몰린 병사들이 결국 자신의 희생을 기꺼히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정작 라이언 일병은 ‘사지에서 싸워온 동료 병사들을 버리고 자신만 살아갈 수 없다’고 거부함으로써, 사령부와 구출팀과 라이언과 그 동료들이 하나로 뭉쳐진다. 적은 악이라는 ‘선과 악’의 논리는 여기선 중요하지 않다.

 

기꺼이 희생하도록

 

정부의 국민에 대한 배려와 비록 그것 때문에 희생될 수도 있는 부류가 그 배려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아닐까. 대신 죽어가면서 ‘우리들의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부탁하는 중대장과 국립묘지의 묘비 앞에서 ‘내가 정말 잘 살았는지 말해 달라’고 그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물기어린 눈으로 이야기하는 라이언은 화합이요, 조화이다.

개인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국가의 입장에서는 외화를 벌기 위해서 광부를 독일로 파견했고,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월남전에 참전했다. 광부와 파월장병들은 한 푼 한 푼 외화를 본국으로 보냈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그것으로 국가가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랬고, 그들의 바램대로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0위에 드는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얼마나 얕보았으면

 

OECD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데에는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도 컸다. 생필품 가격의 안정과 저임금의 기조로 풍년이거나 흉년이거나 농민들은 기지개를 켜 보지도 못했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저임금으로 허덕였다. 그리고 국가는 살졌다.

대한민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을 넘어섰다고 좋아한다. 그렇다면 국민 개개인의 생활도 그것에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모두 2만불 수준의 생활은 누리고 있지 못하는가. 그것은 평균과 통계치의 허점이다. 4명이 100원을 나눠 갖는다면 평균 1인당 25원씩 돌아간다. 그런데 1명이 50원을 갖고 4명이 50원을 나눠갖는다고 해도 표면상 평균은 25원이다. 통계도 이런 속사정이 포함되지 않는다.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가 발전하는 동안 각계 각층에서 떡고물 챙겨 온 정부 고위층들이나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은 그들의 배를 불려주었고, 각종 편법과 탈법을 양산했다. 지금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을 척결하고 있는 중국은 우리의 과거상이다.

어른들은 도망가고, 그들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어린 학생들이 시신으로 돌아온 「세월호의 참사」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깔봤으면 이런 참사가 났을까.

대한민국은 소수의 공무원들의 것도, 삼성이나 현대의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 위에서 군림하지 말고, 국민에게만 의무를 강조하지 말고, 이젠 국가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국가 재건의 가장 우선은 국민에 대한 봉사이다. 국가의 주인공은 다수의 농민이고, 학생이고, 주부이고, 직장인이고 법을 따르며 양심을 속이지 않는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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