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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전 욱으로부터 전화가 왔어. 몇 년이고 만나지 못하다 어쩌다 만남을 갖고, 또 몇 년을 흘려보내는 이상한 관계(?)지만 그날 그녀석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예의 대화처럼 아주 간단하게 끝났어.

뭐해? 바빠?” “그냥 저냥 왜?” “여행가자” “뜬금없이언제” “담주” “이론” “뭔 일 있니?” “버킷리스트” “가자

난 수·목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어. 다행히 월요일과 화요일 23일 가자는 것이어서 홀가분하기 했지만 그날이 아니어도 아마 떠났을거야. 그래 왔잖아. 우리들의 관계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왔으니까.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뭐 그런 사이 말야.

전화를 끝내고 자네에게 연락하려고 했는 데 생각해 보니 우리 연락 안하고 산 지가 벌써 십 년하고도 수 년이 더 지났더라고. 미친 듯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버킷리스트(Bucket List)란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이잖아. 왜 롭 라이너 감독,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영화 제목이어서 널리 알려진. 그 녀석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면서 주저 앉을 뻔 했어. 뭔 말이 필요했겠어. 한 마디면 지금 녀석의 상태가, 마음이 어떤 지 충분할텐데 말야.

 

쥔 것이 없으면 편해

 

녀석이 좋아하는 후배 부부와 넷이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녀석과 나는 그렇게 30년 전으로 돌아갔지. 되짚어 가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 놀랄 뿐이야. 그건 우리가 아직도 명예에 대한 욕심과 물질에 대한 탐욕이라는 기성의 때가 많이 묻지 않았다는 안도이기도 했지만 바꾸어 말하면 손에 쥔 것이 없다는 건지도 몰라.

그 시절 니들이 무슨 겨울나그네?”는 누님의 말처럼 참 많이 방황했던 것 같아. 깊은 우울증에 자살을 마치 자유의지처럼 여겼던 나에겐 욱과의 만남이 한줄기의 빛이었어. 그런 우릴 넌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지. 키 큰 사람치고 속 찬 놈 없다고 너는 장허(長虛), 그 녀석은 항상 웃으면서도 대쪽 같다고 소죽(笑竹)으로 서로 호를 지어주면서 히히덕거렸을 때가 아마 우리 지적놀음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지어준 그 호로 인해 서로에게 실망시키지 않으려 힘들어 하기도 했고, 힘들 때 이겨낼 힘이 되기도 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거야.

왜 우리가 우리의 이름에 대한 뜻을 알 때 부모님이, 주변의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바램을 가지고 있는 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 지 참 깊은 뜻이 있음을, 자신의 삶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것과 같잖아.

설악동 케이블카 앞에 선 짙빨간 단풍 아래서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소죽을 보면서 그 단풍이 핏물처럼 녀석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어. 울긋불긋 색칠된 천지에서 강아지처럼 뛰는 모습이 즐거워 보이면 보일수록 슬픈 건 우리가 벌써 헤어져야 할 시간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어.

 

욕심 버리는 것부터

 

있을 때나 갈 때나 구질구질하지 말자는 약속은 정말 지키기 힘들더라.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는 욕망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지 삶을 사는 동안 보아 오면서 나는 그걸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너희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너희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해. 과정을 중시하려다 목표를 잃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방황했지만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그 몸짓이 지금 나였음을 인정해. 롤랑조페 감독의 미션을 보면서,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읽으면서 극과 극의 인생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 내렸던 우리는, 너무 연약해 바닥까지 떨어지지도 못했지만,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어.

태어나서 아마 이번 여행처럼 호사를 누렸던 적은 없었나봐. 요트도 타보고 맛 집 찾아다니며 먹고 싶은 것 다 사 먹고. 후배들을 데리고 다녔던 과거의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항상 뜬금없는 돌출행동으로 우리를 웃겼던 녀석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몸빼 바지 몇 벌을 준비해 와 우린 화진포 모래밭에서 몸빼 바지입고 뛰어다니기도 했어.

일정 때문에 여행서 빠져 새벽 버스를 탈 때 손에 쥐어준 400페이지에 달하는 두서없는 일기를 읽으면서 버킷리스트의 최우선 순위는 해 보고, 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 “친구 자네가 있어 즐거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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