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굴지의 식품회사에 골판지박스를 납품하는 고령의 사장을 만난 일이 있다. 어찌어찌 해서 단 둘이 술 잔을 기울이게 됐다. 평소 속내를 내비치지 않던 그 분은 그날 따라 술 기운이 과했는 지 그동안 하청하면서 겪었던 일을 털어놨다.

내가 말이지 30여년을 그 회사에 골판지 박스를 납품하면서 참 많은 서글픔을 안고 살아 왔어. 30대 중반 회사를 그만두고 이 일을 하게 됐는 데 그 때는 젊은 기운에 그리고 그 회사의 총무직원 나이도 엇비슷해서 그런대로 어울렸지.

근데 나이가 들면서 저쪽 직원은 자리를 옮기고 새파랗게 젊은 직원과 상대하게 되니 정말 아니꼬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더라고.

발주를 하는 직원은 하청회사의 사장 알기를 마치 봉으로 알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항상 부리려고 해. 해외여행 경비는 물론이고, 다른 접대비, 자신의 가족여행에도 뭔가를 요구한단 말야. 이거 못 맞춰주면 납품에 애로사항이 발생하고 심지어는 납품 라인까지 바뀌는 일도 있어.”

하청업체는

그 분은 집에 들어갈 때 대문 밖에서 항상 토악질을 한다고 한다. 매일 술이요, 매일 접대 고스톱을 쳐야 하고. 그 분의 아내는 한 번은 술을 끊게 하겠다고 국에 술 끊는 약을 몰래 탔다가 큰 일을 치룰 뻔 했다고 한다.

하청업체들끼리 가족여행을 갈 때도 그 직원 가족까지 데려가고, 해외에서 쓰는 경비는 물론 선물까지 챙길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아내가 알고는 그 다음부터 함께 여행을 안가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그 분은 다른 하청업체들은 아들이 있어서 그런 일들을 당하는 일이 별로 없지만 자신은 아들도 없고, 그렇다고 딸을 이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 고스란히 수모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생전 처음으로 속을 털어놔 그래도 조금 기분이 풀린다는 그 분의 젖은 눈가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최근의 남양유업 사태를 보면서 속이 뒤집히는 건 유업체 관행의 밀어내기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기업이 보인 파렴치한 행위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남양유업과 대리점과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아마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남양유업은 대리점 피해자협의회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 행위에 대해 고발장을 내자, 회장을 비롯 대리점주 3명을 상대로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걸어 고소했다. 그러나 영업사원 막말 녹취록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역전됐다.

부도덕한 거래 되풀이

그 와중에도 남양유업은 사과문 하나 달랑내고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떡값 요구까지 폭로되자 남양유업은 사과문의 내용을 또 바꿨다. 그리고 SNS, 소셜네트워크를 비롯, 모든 언론매체가 합세하면서 9일 김웅 대표를 포함한 본부장급 이상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대리점주와의 상생의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대기업과 하청업체들과의 부도덕한 거래 관계에서 보여주는 진행상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정말 무엇이 잘못인지, 어떻게 잘못했는 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발 뺌하다 들통나면 그 부분만 사과하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국민적 여론은 냄비근성이라면서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지금까지 이러한 행위는 대부분 맞아 떨어졌다. 소비자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악덕 기업의 행동을 줄기차게 비난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대기업과 유착해 왜곡시키면서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소비자도 그런가?

이번의 남양유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시발점은 다르지만 일본 굴지의 유업체였던 유키지루시(雪印)사와 과정이 너무 흡사한 점이 놀랍다. 유키지루시사의 경우는 2000년 오사카 공장의 라인 오염으로 인해 11376명의 식중독 피해자를 발생시킨 것에서 비롯됐다.

옛날의 소비자 아냐

그러나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현재 남양유업과 같이 책임을 회피하면서 소비자를 기만했다. 소비자들의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전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2002년 호주산 쇠고기 둔갑판매가 들통 나면서 도산의 결정적인 한 방을 맞았다. 100억엔 이상의 영업손실과 주가 폭락으로 일본 우유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던 1위의 유업체이며, 22개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종업원만 7000여명이 종사했던 유키지루시사는 문을 닫았다.

남양유업도 막말떡 값 요구까지 공개되면서 주식가치 1200여억원이 날라갔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상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업체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대표 브랜드는 자기의 상표를 붙이는 대기업의 것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모두의 것이다. 막강한 영업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은 그들의 몫이지만 자사의 상품가치를 올리는 것은 주변 협력업체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이다.

상생이란 올바른 기업 가치를 말한다. 개인의 관계에서조차 상생의 의미가 와 닿는 데 하물며 기업의 입장에서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윤리상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나 때문에 많은 협력업체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생존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양유업 사태가 유업계의 윤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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