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을 사람들만이 아는 뒷산을 올랐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법한 곳에도 흔적이 쌓여 길이 나 있습니다. 누군가도 같은 고민으로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으로 이 길을 올랐을까요?

짙초록 잎들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고, 그 햇살 때문에 잎들은 또 검게 변합니다. 벌레도 울지 않고, 가벼운 바람의 스침만이 귓가에 맴돕니다. 상념의 꼬리를 상념이 물고, 풀과 나무와 햇살이 나와 어울리면서 세상에 덩그러니 남은 날 위로했습니다.

L!

너무 격조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20여년을 지내오면서 서신이 왕래하고 만난 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우리도 참 어지간했습니다. 말도 별로 하지 않은 채 쓴 소주만 들이키다가 가끔씩 어깨걸이 할 때도 있었지만 대학이란 곳을 졸업하곤 우린 한 번도 어깨걸이한 기억이 없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연 듯 형 생각이 날 때가 있는 데, 그때는 어김없이 내가 상념에 젖어들게 될 때였습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세상이 답답할 때이거나, 이념적 충격이나 문화적 충돌 때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대형마트에 51개 제한품목을 권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언론에서 기자가 직접 시장을 보면서 권고가 현실화됐을 때 겪게 될 소비자의 입장을 1페이지 이상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그 일로 후배들과 토론한 일이 있었는 데 한 후배가 어떻게 대기업의 입장에서 저렇게 쓸 수 있느냐며 내용은 접어두고 그 신문이라는 이유로 성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의 성토는 마치 망치로 뒷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골목 상인들의 생존권은 보장돼야 한다는 취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있은 후 그 말은 길을 걷거나 잠시 쉬게 될 때 머리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거나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다가 우리의 과거로 되돌아가게 됐습니다.

 

L!

우리가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 쯤인가로 기억됩니다. 일본문학사를 가르치던 교수가 일본의 기미가요와 우리의 애국가를 비교하면서 기미가요 내용 중 작은 돌이 큰 바위로까지 되어 그 바위가 이끼가 낄 때까지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보다 진취적이고 생산적이라면서 애국가를 비하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형은 문화와 문화는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비교될 수도 비교대상도 아니라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우린 그 교수에게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물론 사과는 받아내지 못했지만 당시 헤르만 헤세에 심취했던 나에게 형은 지와 사랑의 나르치스였고, 싱클레어가 끊임없이 지켜보던 데미안이었습니다. 그 이후 우린 많은 지적놀음을 하게 됐습니다.

경제학의 자도, 사회학의 자도, 민주주의의 자도 모른 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종속이론이니, 사회주의의 이념을 본의 아니게 접하게 됐습니다. 소위 의식화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기존에 몰랐던 부조리와 부정을 일찍 알게 됐습니다. 나치 파시즘에 저항하다 교수형 당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미친 운전자의 차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보다 그로부터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군사정권 시절의 우리에겐 고뇌그 자체였습니다.

 

L!

당시 우리가 간과한 것은 우리들의 그 의식화(?)라는 것이 식자의 놀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형성되지 않은 이념과 사상을 한 쪽으로 몰고 가므로써 저항세력에 편입되기는 했지만 균형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올바른 사고 자체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것 같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합니다.

사회에 대한,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애정의 토대 없이는 그 모든 것이 가식이거나 나의 위안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단지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 마치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386세대와 486세대가 실패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권력을 잡은 그들이 바로 같은 세대들로부터 외면당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곤 설명하기 참 힘들었습니다.

애정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기 검정에서 비롯됩니다. 공무원이 월급쟁이로 전락하면 그 후유증은 모든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버리면 양심이고 뭐고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청문회를 보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느꼈던 감정은 불쾌감과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혐오감을 넘어 좌절감이었습니다. 고위 공직자 사회는 부정과 부조리가 시스템화돼 지속적으로 대를 이어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민과 괴리된 사회에 살면서 마치 서민들도 자신들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갖는 것.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뼛속 깊숙이 썩어있다는 반증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미래를 강조하고, 창조를 모토로 삼아 백년지대계의 기틀을 다진다고 합니다. 정권의 의식이 바뀐 걸까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그 행동이 쌓이면 습관이 됩니다. 형이 이 나라를 떠날 때 나도 비로소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한 번 더 기대해 볼까요?

저작권자 © 축산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